13 무엇을 경험하든, 그것을 거부하십시오 우리는 어제 속임수에 빠지는 것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사마디의 속임수에 빠져드는 요기, 말라 기도의 속임수에 빠져 드는 박 따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공동체가 속임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 우리가 말한 그 모든 속임수들은 외적인 속임수 들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어제 우리가 토론한 내용을 기억합니다. 말라, 독서, 다른 방법들을 따르기 등등. 오늘은 내적 함정들을 다룹시다. 어제 우리가 이야기한 것들은 모두 외적 함정들이었습니다. 내적 함정들에 대해 이야기해 봅 시다. 내적 함정들이란 무엇입니까? 다섯 개의 내적 함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몸입니다. 즉 음식으로 만들어진 몸과 동일시하는 것(안나마야 꼬사)입니다. 그 다음은 생명력을 가진 호흡, 즉 쁘라나로 만들어진 몸 인 생명력의 몸(쁘라나마야꼬사)입니다. 이것은 내부에 있습니다. 그렇 죠? 그 다음에 마음의 몸, 즉 마음(마노마야꼬사)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지성의 덮개, 즉 지적인 몸(비갸나마야꼬사)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희 열의 몸(아난다마야꼬사)이 있습니다. 이 몸속에는 희열을 향한 애착이 있습니다. 소위 이 모든 몸들, 즉 ‘나’가 작용하는 이 덮개들은 속임수 들입니다. 자유는 외적 속임수들 너머에 있습니다. 이것들은 내적 속 임수들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몸이다.” 또는 “나는 생명력을 가진 호 흡이다.” 또는 “나는 마음이다.” 또는 “나는 지성이다.” 또는 “나는 희 열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와 만날 수 있기 전에 이 모든 내 적 동일시들 너머로 가야 합니다. 내적 속임수와 외적 속임수 둘 다가 없어져야만 합니다. 스승님은 우리가 결국에는 어떻게 이 몸들 중 한 몸과 동일시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안에 자기의식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이 ‘자기’와의 동일시가 이 내적 속임수들 중 하나입니까? 스승님께서는 최근에 ‘나’라는 생각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그 것을 조용히 탐색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제 스승님께서는 제게 “누가 묶여 있는가?”라고 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나’라는 생각이 가장 근원적인 생각입니다. 모든 것 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굴레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무지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삼사라가 시작됩니다. 이 ‘나’라는 생각에 이르러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당신은 생각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 러면 거기서 생각 자체가 사라집니다. ‘나’라는 생각이 결합하여 동일시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거부하 여 ‘나’라는 생각을 격리시키는 것이 좋습니까? 무엇을 경험하든, 그것을 거부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발견하는 곳 은 그곳이 어디든 거부하십시오. 당신이 지각하거나 상상하거나 보는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을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생 각하고 거부하십시오. 자신을 이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시키십시오. 결 국 당신은 어떤 곳, 즉 어떤 지식에, 다시 말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어 떤 지식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 지식을 거부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평 범한 구별적인 지식을 통해, 당신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지식에 이르게 될 것 입니다. 떠날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그 지식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것 이 당신의 실재입니다. 당신이 동일시하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거부하십시오. “나는 육체 적 몸이 아니다. 나는 정신적 몸이 아니다. 나는 지적 몸이 아니다. 나 는 희열의 몸이 아니다.” 이 모든 동일시가 더 이상 없을 때 ‘나’ 자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로지 다른 실체와 관련된 실체로 서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개별적인 ‘나’는 그 밖에 어떤 것과 도 연관을 맺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다 그 뒤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 고 이원성이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이 ‘나’가 사라지는 곳, 그 곳에서 참지식이 일어납니다. (새 질문자) 그 ‘나’라는 것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지요. 그렇죠? 그 ‘나’라는 것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연관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습 니다. 저는 며칠 동안 아침에 일어나 ‘나’를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어떤 대상을 움켜쥐는 것을 지켜봅니다. 마음이 어떤 대상에 달라붙는 것을 지켜봅니다. 살아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침은 온통 제 주위로 어떤 공간, 어떤 조용한 공간이 있다는 느 낌이 있는데, 그러나 그 뒤 마음이 그 공간, 즉 그 고요를 움켜쥐더니 거기서 어떤 대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그 조용한 공간과 침묵을 대상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은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합니다. 이것 이 나타남의 세상이 매일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이 ‘나’에 의문을 제기 할 때, 나타남의 세상은 ‘나’ 자체와 더불어 끝날 것입니다. 그 뒤 다른 어떤 것이 남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나타남뿐만 아니라 그 ‘나’의 소 멸을 지켜보는 어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