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의 2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의 말은 오직 조약돌에 관한 말입 니다. 다이아몬드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사실, 그것은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의 빛으로 단순히 빛날 뿐입니 다.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의 광택, 그 자체의 광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사람의 설명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이아몬 드입니다. 중재하는 어떠한 매개체도 없는, 말하자면, 스승도, 경전 도, 마음도, 수행도 개입되지 않는 다이아몬드에 대한 직접적인 깨달 음이 곧 직접적인 참된 지식입니다. 자유에 대해서도 이처럼 진실하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중재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이 필요합니 다. 가르침, 수행 등과 같은 기타 모든 것은 단지 그것에 대한 간접적 인 정보를 주는 지도에 불과합니다. 지도는 실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이나 설명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많은 지도나, 당신에게 설명을 해주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모두가 관계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은 하 나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지식은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 견하기 위해 정말로 지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무엇을 말 하든지, 그 대상이나 그 사물은 당신과 분리된 어떤 것입니다. 심지어 ‘참나’라는 단어도 단지 당신이 말하는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 은 진짜가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 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너무 가까이 있다면, 당신은 그 것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지적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숨 결보다도 더 가까이 있으며, 당신이 눈으로 보는 망막 뒤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각의 시작보다 앞에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볼 수 있다 면 보십시오. 당신에겐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제가 말하는 건 그 갈망보다 더 앞에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겠습 니까?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 후에 자유에 대한 가르침만이 그곳 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최근에 말씀해 주신 성숙의 과정과, 또 일부 사람들이 좋은 경험을 한 뒤에 겪는 것처럼 보이는 추락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제가 영국으로 돌아가서, “나는 자유롭다. 이러한 문제들은 나에게 영 향을 줄 수 없다.”라는 입장을 취해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을 알 았습니다. 그러한 자세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지도,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결국엔 저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일에 파 묻혀야 하며, “나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 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을 처리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어떤 것도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 주위 에 안전지대를 펼치려고 노력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 다. 저는 세상의 일상적인 문제들로부터 숨어 버림으로써 ‘무자유’의 상태를 드러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초연한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문제들이 생겼을 때 평소 방식으로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진정한 자유는 그런 문제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때가 되면, 당신은 행동해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전쟁터에 있다 면 총을 들어 쏘는 것이 당신의 일입니다. 장미 화환을 들어 올리는 것 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싸우는 것이 당신이 따라야 할 다 르마(법)라면, 당신은 도망가거나 숨지 않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당 신이 지켜야 할 다르마가 무엇이든 뿌리, 즉 근원을 잊어서는 안 됩니 다. 명상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싸움을 하든지, 근원은 똑같습니 다. 항상 그 근원을 자각해야만 하며 그것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합 니다. 이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 약 당신이 행동을 하도록 하는 이 근원을 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 입니다. 항상 지시가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지시자가 당신에게 지시 를 내리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간섭하지 않고 모든 지시된 행동이 일어나도록 허락한다면, 어떤 것에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보다 고차원적인 이 힘이 시키고 있는 일을 단순히 행하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행동을 하겠다 거나 안 하겠다는 어느 하나를 결정함으로써 그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 다. 이런 선택은 당신이 할 수 없습니다. (새 질문자) 조금 전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자유는 자유를 갈망하는 것보다 앞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을 때 무엇인가가 저를 한 대 치는 것 같았 습니다. “자유 그 자체와 자유를 갈망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자유 그 자체는 자유를 갈망하는 것보다 앞선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당신이 자 유롭지 않다는 것을, 이전에 존재했던 그 상태를 떠나서 다시 그곳으 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자유에 대한 그러한 갈망이 일어나면, 그 갈망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아내는 데 평생을 바치십시오. 만약 결국 그 장소에, 그 자유에 도달 한다면, 당신은 즉시 이 자유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당신이 항상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당신 은 자유에 대한 이런 갈망이 이미 있던 것을 당신이 무시했거나 알지 못했던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유를 찾게 되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참나의 본성으로 자연스럽 고도 자발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자유에 도달하면, 당신은 즉시 “난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항상 여기에 있었지만 내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라는 것을 알고 이해할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어릴 적에 저에게 일어난 사건, 즉 제가 망고 슬러시를 받아들고 난 뒤에 전신을 마비시키는 아름답고 행복한 상태에 빠져 그 것을 마실 수 없었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자 유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갈망도 있기 오래 전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제가 정상적인 의식 상태로 돌아왔을 때, 그 상태로 다시 돌아가 그것 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싶은 어쩔 수 없는 충동이 있었습니다. 전 그 당 시에 그것을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그 런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굉장한 충동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행복감은 무엇인가? 무척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러한 것은 무 엇인가? 나는 지금까지 그와 대등한 어떠한 것도 보지 못했다.” 이러한 탐색은 저를 사로잡았고, 이러한 아름다운 상태로 거듭 뛰 어들도록 강요했습니다. 비록 다시 그 상태를 경험해보았지만 저는 그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결코 설명할 수 없었고, 그것에 대 해 결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이따금 그것은 ‘만질 수 없다’라든가,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설 명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충동은 여전히 있어서, 그 때문에 저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 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자 어서, 저에게 그것을 설명해 보십시오! 저에게 약간의 힌트를 주십시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가까이 와 서 들려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여태까지 아무도 그것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사람들이 설명하려고 하는 말을 듣기 좋아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고도 스승님이 그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 기까지는 그것이 자유인지를 모릅니다. 스승님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 습니까? 라마나 마하리쉬 같은 누군가가 이런 경험을 확인시켜 주었 습니까? 스승님도 그런 확인이 필요했습니까? 말로는 아니었지만, 확인은 있었습니다. 그의 면전에서 저는 제가 어렸을 적에 자연스럽게 찾아왔던 것과 똑같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상 태로 빠져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똑같은 상태란 것을 알았고, 그것 이 저 자신의 참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이미 알고 있던 진리에 대한 확인과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절대 설명할 수 없으며, 절대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말합니다. 붓다는 그것을 텅 빔, 즉 ‘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 역시 진실한 설명이 아 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방 법에 불과합니다. 라마나는 그것을 ‘아루나짤라’나 ‘움직이지 않는 빛 의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루나짤라의 뜻입니다. ‘아짤 라’는 ‘부동’과 ‘산’ 둘 다를 뜻하고, ‘아루나’는 ‘빛’을 뜻합니다. 이것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그의 묘사이고 설명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제대로 설명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제가 단어를 생각해 내려면 ‘행복’과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만, 이 단어들도 완전하게 정의할 수 없는 것을 단지 암시해 주는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LOG IN 로그인
 
SEARCH 검색
LOG IN 로그인
CART 장바구니
 
 
SEARCH 검색
LOG IN 로그인
CART 장바구니
 
글쓴이
내용
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사업자정보확인

호스팅제공자: (주)식스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