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정말이지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행위를 완전히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의 결과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사람이 진정한 초연(띠야기)이다. 12. 행위의 결과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죽은 후에 바람직한, 바람직하지 않은, 양자가 혼합된 세 결과(까르마)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띠야기 즉 버린 사람에게는 결코 없다(그것들의 까르마를 초월할 것이다). 13. 오, 강한 힘을 지닌 자여! 샹끼야 이론에서 말하는 모든 행위(자동적인,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지적)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다섯 측면(요인)을 나로부터 배워라. 샹끼야 이론은 모든 행위의 종료이다(참나는 행위가 없는 고요한 목격자이다. 참나에 대한 지식이 일어날 때, 모든 행위는 종료된다). 14. 이 다섯 요인은 행위의 자리(몸. 탐욕, 미움, 행복, 불행, 지식 등, 인간은 몸을 통하여 자연과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기쁨과 고통을 경험한다), 행위자(자아, 경험하는 자, 즐기는 자, 에고이즘, 자연이 행위를 하지만 미혹으로 자신이 행위 한다고 생각한다), 감각(눈, 코, 귀, 입, 피부), 여러 기능(지각기관을 통하여 자극을 받아들인 후 지성의 도움으로 마음에서 그것을 분석한 후 자아는 다섯 몸의 도구 즉 수족, 호흡, 순환, 소화 그리고 배설기관을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주재하는 데바(다섯 원소에 해당하는 감각기관에 각 기능을 관장하는 데바가 있다. 신성한 섭리, 신의 뜻, 환경, 운명, 과거 행위의 요약된 영향이 지배하는 경향성, 지배하고 있는 이 조용한 신성은 현재와 미래의 인간 활동에 영향을 강제하고 있다)가 그것이다. 15. 사람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옳거나 그른 무슨 행위를 할 때 이 다섯이 필요한 원인이다. 16. 그러한데도, 정화되지 못한 지성(진리를 알도록 마음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 경전이나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못한)을 지닌 사람은 순수한 참나(참나는 항상 행위 없이 있다. 그는 공간처럼 집착하지 않고 있다. 참나는 늘 샥쉬 즉 목격자로 있다. 참나는 분할 할 수 없으며, 모든 곳에 퍼져 있으며, 무한하며, 수족이 없으며, 부분이 없으며, 독립적이며, 늘 자유로우며 변하지 않는다)를 행위자라 생각한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며 전혀 모르고 있다. 17. 행위자 개념(아함까라 즉 행위자라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때, 그의 식별하는 지성(붓디)이 더 이상 물들지 않는다. 비록 그가 자신의 적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행위자가 아니며 그리고 (그 행위로) 묶이지 않는다(순수한 참나는 좋거나 나쁜 행위의 결과를 지니지 않는다. 아르주나의 낙담에 대한 간접적인 답). 18. 인간은 욕망의 경험자이다. 아는 자이다. 주위에는 즐기고 싶은 가지고 싶은 많은 대상이 있다. 그것은 유혹이다. 그것은 알고자 하는 것이다. 바라는 것을 가질 때, 그것을 경험하고, 그래서 그것은 경험으로 남는다. 그것이 경험이고, 지식이다). 인간이 모든 행위(무엇을 가지거나 무엇을 피하는)를 하게 하는 행위의 세 충동은 지식(현재 지닌 지식, 기억, 경험), 알고자 하는 것(즐기고, 가지고 싶은 것), 아는 자(현재의 행위자)이다. (욕망 때문에 아는 자가 될 것이고 활동의 장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행위 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났을 때, 행위의 장이 있어야만 한다. 무엇이 행위의 바탕을 만드는가?) 행위의 세 바탕은 자아(행위자, 무엇을 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자아는 가진다. 욕망 때문에 행위자가 될 것이다. 행위의 기관을 움직이는 사람), 행위 기관(지각, 행위, 마음, 지성의 도구를 사용한다), 행위(몸과 말과 마음의)이다. 19. 샹끼야의 (구나) 이론에 따르면, 지식(갸나), 행위(몸, 말과 마음의 까르마) 그리고 행위자(행위의 기관을 움직이게 하는, 까르따)는 세 유형이 있다고 말해진다(세 구나가 온 창조물을 움직인다). 이것 또한 들어보아라. 20. 모든 변화하는 존재 속에서 하나의, 파괴할 수 없는 실재를, 모든 분리된 것 속에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를 보는 지식은 삿뜨바적인 지식이다(하나, 파괴할 수 없는, 분리할 수 없는, 모든 것에서 신의 현존을 인식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