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라두 나르빠두

울라두 나르빠두Ulladu Narpadu(실재에 대한 40연의 시) [만갈람 Mangalam(기도문)] 울라 달라 둘라 부날 울라도 불라 뽀룰울라 라라 불랏떼 울라 달 울라 메눔울라 뽀룰 울라레반 울랏떼 울라 빠디울라데 울랄 우날바예 울레 실재가 없다면 실제에 대한 생각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 실재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슴 속에 존재하는데, 누가 가슴이라 불리는 그 실재에 대해 명상할 수 있겠습니까? 가슴 안에, 그것의 있는 모습 그대로 머무는 것이 진정 (가슴에 대해) 명상하는 것임을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마라나 바야 믹꿀라 밤 막깔라라 나가마라나 바바 밀람 아게샨 샤라 나메샬발 딴 샬보두 단 샤붓뜨랄 샤벤난샬바로 샤바 다발 닛딸 빨바이 셸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죽음이 없고 탄생도 없는 지고한 신의 발에 피난처를 구할 때, 그들의 자아와 집착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죽지 않고, 죽음에 대해서도 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눌Nul (본문)] 1. 나물라강 깐달 랄 나나반 샥띠 울라 올무달라이 옵빨 오루 달라이예 나마부루 찟띠라 뭄 빨 빠눔 쩰빠다 뭄 아롤리 윰 앗따나이 윤 따남 아반울라구 깔따 누일 우리는 세상을 알기에, 하나이지만 여럿으로 보이는 힘을 가진 공통적인 근원에 대해 모두 인정해야 합니다. 이름과 형상의 영상, 구경꾼, 화면, 비추는 빛,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그분Him입니다. 2. 뭄무달 라이 옘마 다뭄 울꼴 룸 올무 달레 뭄무달 라이 닐꾸 멘드루 뭄무달 룸 뭄 무달레 옌날 아항까 람 이룩꾸 맛떼 얀 껫뚜 딴닐라이 일 닛뜨랄 딸라이 야궁 꼰네 모든 교리는 세 개체 즉 개인, 신, 세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셋이 된다.’와 ‘셋은 항상 셋이다.’라는 것은 오직 자아가 지속이 될 때만 말해집니다. ‘나’를 잃고 참나 안에 머무르는 것이 지고한 상태입니다. 3. 울라구메이 뽀이 똣뜨람 울라가리 밤 안드렌 드루 울라구 수감 안드렌 드루라잇 뗀 울라구 빗뚜 딴나이 욘 돈드리 란두 따낫뜨루 나낫뜨라 안닐라이 옐 랄꿈 옵빠 무네 뚠눔 ‘세상은 진짜다!’ ‘아니다, 그것은 가짜 모습이다’. ‘세상은 마음이다!’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아니다’ ‘세상은 즐겁다!’ ‘아니다, 그것은 즐겁지 않다’. 이런 대화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을 내버려 두고 참나를 아는 것, 하나와 둘이라는 모든 생각을 넘어서는 것, 이 자아 없는 상태가 모두의 공통 목표입니다. 4. 우루반 단 아인 울라구 빠라 맛뜨람 우루반 단 안드렐 우밧뜨린 우루밧 따이 깐누루 달 야바 네반 깐날랄 깟찌 윤도 깐나두 단 안다 밀라 깐나메 옌닐 만약 참나가 형상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과 신도 마찬가지로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참나가 형상이 없다면, 누구에 의해 또 어떻게 (세상과 신)의 형상이 보일 수 있겠습니까? 눈이 없으면 모습이나 광경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진정한 눈인 참나는 무한합니다. 5. 우달 빤짜 꼬샤 우루바다 날 아인둠 우달옌눔 숄릴 오둥 굼 우달안드리 운도 울라감 우달비 뚤라갓 따이 깐달 울라로 까라루 바이 깐다 몸은 다섯 개의 덮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몸이라는 말 안에 다섯이 모두 포함됩니다. 몸이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몸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6. 울라가임 뿔란 갈 우루베 란 드라우바임 뿔라 나임 뽀릭 꿉 뿔라 남 울라가이 마남 온드라임 뽀리 바얄 온디두 다 란마낫따이 안드리 울라군도 아라이 네레 닌드라 세상은 다섯 종류의 감각 지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각들은 다섯 감각의 대상으로서 감지됩니다. 감각을 통해 마음만이 세상을 지각하는데, 세상은 마음 외의 것입니까? 7. 울라가리 붐 온드라이 우딧 또둥구 메눔 울라가 리부 딴날 올리룸 울라 가리부 똔드리 마라이 달끼따 나이 똔드리 마라이야 돌리룸 뿐드라 맘 아흐데 뽀루 라말 옌드라 담 우리 앞에 있는 세상과 마음이 함께 생겨났다 가라앉는다 할지라도, 세상이 빛을 내는 것은 마음을 통해서입니다. 세상과 마음이 모두 나타나고 사라지는 장소처럼, 나타남과 사라짐이 없이 빛나는 완벽인 그것이 진정 실재입니다. 8. 옙빠 야리 떼부루 빌 옛 띠누말 뻴 우루빌 압뽀룰 라이 깐 바리야 다이누 맘 메입 뽀룰린 운마이일 딴 운마이 이나이 온도 둥기 온드루 달레 운마이일 까날 우난 디두가 빈마이 우리가 그것을 어떤 이름과 형상으로 숭배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를 이름이 없고 형상이 없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지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존재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참나를 보는 것, 그것 안으로 가라앉아서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진리에 대한 진정한 지식입니다. 9. 이랏따이 갈 뭅뿌디 갈 옌드루 몬드루 빳뜨리 이룹 빠밤 압본 드레 덴드루 까룻 띠눌 깐달 까랄루 마바이 깐다 바레 운마이 깐달 깔랑 가레 까니룰 뽄 만둠 ‘두 개의 것’과 ‘세 개의 것’은 하나, 즉 자아에 의존합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가슴 안에서 ‘이 자아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것을 찾으면, 그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사람들만이 진리를 알고, 그들은 결코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아리 야마이 빗따리 빈 드람 아리부 빗따으 아리 야마이 인드라 굼 안다 아리붐 아리야 마이윰 알껜 드람 무달란 딴나이 아리 윰 아리베 아리 밤 아리바 무지가 없다면 어떤 지식도 없습니다. 지식이 없다면 무지도 없습니다. ‘이 지식은 누구의 것인가?, 이 무지는 누구의 것인가?’라고 묻고 이같이 태고의 참나를 아는 것, 이것만이 지식입니다. 11. 아리 부룬 딴나이 아리야 다얄라이 아리바 다리 야마이 안드리 아리보 아리 바얄 까다라 딴나이 아리야 아리 바리 야마이 아루메 아라베 아는 참나를 알지 못하고, 모든 대상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무지일 뿐입니다. 지식과 비참나의 기반인 참나가 알려지면, 지식과 무지는 모두 사라집니다. 12. 아리 바리 야마이 윰 앗뜨라 다리 바메 아리 유마 둔마이 아리 바가두 아리 달꾸 아리 빗딸 깐니야 민 드라야 빌바 달 딴 아리 바굼 빠란 드라리 바이 셰리 바야 진정한 지식은 지식도 대상에 대한 지식도 없는 것입니다. 대상에 대한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 아닙니다. 참나는 그것을 아는 그 어떤 것도 없이 스스로 빛나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이 없는 참나가 지식입니다. 텅 비어있음,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13. 야나 맘 따네 메이 나나바 야나 만 야나 맘 뽀이얌 안 야나무메 야나 만 딴나이 얀드리 인드라니 갈 땀 빨라붐 뽀이메이 얌 뽄나이 얀드리 운도 뿌갈우다 난 옌누 맛 자각인 참나, 그것만이 진짜true입니다. 여러 지식은 무지입니다. 그리고 가짜false인 무지라고 해도 참나와 별개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많은 모양으로 있는 장신구는 가짜인데, 그것들은 진짜인 금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딴마이 운델 문닐라이 빠달 까이갈 땀 울라반 딴마이 인 운마이 야이 따나인두 딴마이 야린 문닐라이 빠달 까이 무디 붓뜨론드라이 올리룸 딴마이예 딴닐라이 마이 따니다 뭄 만눔 ‘그대’와 ‘그’, 이것들은 ‘나’가 나타날 때만 나타납니다. 그러나 ‘나’의 본성nature이 구해지고 자아가 파괴되면 ‘그대’와 ‘그’는 끝이 납니다. 그때 하나의 존재로서 빛나는 것이 진정한 참나입니다. 15. 니갈 비비나입 빳뜨리 이랍 뻬딜부 닐빠 니갈 갈 아바이윰 니갈베 니갈 본드레 인드룬 마이 떼라 디랍 뻬딜부 떼라 부날 온드린드리 옌날 우날루나라 닌드라 뽀룰 과거와 미래는 매일 겪게 되는 현재에 그들의 존재를 의존합니다. 그것들이 나타나고 있는 동안에는 이것들 역시 현재입니다. 현재만이 존재합니다. 지금에 대한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숫자 1이 없이 수를 세려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16. 남안드리 날레두 나데두 나둥 갈 남우담벨 날 낫뚤 남 빠두밤 나무담보 남인드란 드렌드루 몬드루 나딩 강 겐구 몬드랄 남운두 나나딜 나무 남 아밉 우리가 없으면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지 육체라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갇힙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체입니까? 지금, 그때 그리고 언제나, - 여기, 지금 그리고 어디에서나 – 우리는 똑같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공간을 초월해 존재합니다. 17. 우달 나네 딴나이 우나랄 꾸난 달꾸 우달 아라베 난단 우날 알꾸 우달 울레 딴누난 달 껠라이 야라 딴올리룸 난이두베 인나 발담 베다 메나 옌누 바이 문남 참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 참나를 아는 이들에게, 육체는 ‘나’입니다. 하지만 참나를 모르는 이들에게 ‘나’는 육체에 의해 한정되지만, 육체 안에서 참나를 아는 이들에게 ‘나’는 한계가 없이 빛납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20. 울라 군 마이 야굼 우날 빌랏 꿀 랄꾸 울라 갈라 밤 운마이 우날 알꾸 울라기 눅꾸 아다라 마이우루 밧뜨라 룸 우난 달 운마이 이다 굼 베담 이발 껜누가 베다 모르는 이들과 아는 이들에게 세상은 진짜입니다. 하지만 모르는 이들에게 실재는 세상에 의해 한정되지만, 아는 이들에게 실재는 세상의 기반으로서 형상이 없이 빛납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19. 비디 마디 물라 비베감 이랄께 비디 마디 벨룸 비바 담 비디 마디 갓 올 무달 란 딴나이 우난 달 아바이 따난 달 샬 바로 삔누 마바이 샷뜨루바이 샬바 바이 ‘자유의지가 우세한가, 아니면 운명이 우세한가?’라는 논쟁은 그 둘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이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운명의 공통적인 근원인 참나를 안 이들은 그 둘을 모두 초월했고 그것들에게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20. 까눔 따나이 빗뚜 딴까다 부라이 까날 까눔 마노 마야 망 깟찌 다내이 까누 마반 딴 까다 불 깐다 난 딴 무달라이 딴 무달 뽀이 딴 까다 불 안드리일라 달 우이라 딴 까루 둠 신을 보면서 참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투사만을 보는 것입니다. 신은 참나를 보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아를 잃고 참나를 본 이가 다름 아닌 바로 신입니다. 21. 딴나잇 딴 까날 딸라이 반 따나익 까날 옌눔 빤눌 운마이 옌나이 예닌 딴나잇 딴 까날 에반 따논드 랄 까나 보나 뎃뜨라라이 발 까날 에반 우나달 까네바이 융 까눔 경전이 ‘참나를 보는 것’과 ‘신을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들이 뜻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참나를 봅니까? 참나는 둘이 없는 하나이기에 그것을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신을 봅니까? 그분을 보는 것은 그분에 의해 소멸되는 것입니다. 22. 마딕 꼴리 딴 담 마딕 꿀 올리 룸 마디 이나이 울레 마닥끼 빠디 일 빠딧 띠두 달 안드립 빠디 야이 마디 얄 마딧 띠두 달 옝간 마디 야이 마디 일라 달 마음 안에서 빛나고 모두에게 그 빛을 나누어주는 그의 빛 안에서, 안으로 향하여 신에게 합쳐지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마음이 가진 빌린 빛으로 빛 중의 빛을 알 수 있습니까? 23. 나 넨드리 데함 나빌라 두락 깟뚜 나 닌드렌 드라루 나빌 바딜라이 난온드루 예룬 다삔 옐람 예루 민다 난엥구 예룸 엔드루 눈 마디 얄 옌나 나루 붐 몸은 지각이 없기에, 이 몸은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잠이 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가 생겨난 후, 다른 모든 것들도 생겨납니다. (누군가) 예리한 마음으로 이 ‘나’가 생겨나는 곳을 살펴보면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24. 자다 부달 나 넨나두 삿찟뜨 우디 야두 우달 라바 나논 드루딕 꿈 이다이이 리두 싯 자다 그란디 반담 지바 눗빠 메이 야간 다이 이짜무 사라 마남 옌난네 비짜이 물질인 이 몸은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자각은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둘 사이에서 몸에 의해 한정되어 ‘나’에 대한 생각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물질과 자각의 매듭입니다. 이것은 속박입니다. 이것은 미묘한 몸 또는 자아, 지바입니다. 이것은 삼사라입니다. 이것은 마음입니다. 25. 우룹 빳뜨리 운담 우룹 빳뜨리 닐 꿈 우룹 빳뜨리 운두 미가 옹굼 우루 빗뚜 우룹 빳뜨룬 떼디 날 옷땀 삐딕 꿈 우루 밧뜨라 메이 아간 다이 올바이 까루 밤 그것은 형상을 취하면서 생겨나고, 형상을 취하면서 머무르며, 형상을 취해서 형상을 먹고 자라납니다. 하나의 형상을 떠나면 그것은 또 다른 형상을 취합니다. 발견되면 그것은 달아납니다. 그런 것이 바로 아무런 형상이 없는 자아라는 유령입니다. 26. 아간다이 운다인 아나잇뚬 운다굼 아간다이 인드렐 인드라나잇뚬 아간다이예 야부맘 아달랄 야디덴드루 나달레 오부달 야부메나 올무달뽈 메부민다 자아가 일어나면, 모든 것들은 그것과 더불어 일어납니다. 자아가 없을 때,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같이 자아가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모든 것들의 소멸입니다. 27. 나누디야 둘라닐라이 나마두바이 울라닐라이 나누딕꿈 따남아다이 나다말 나누디야 딴니랍빠이 샬바데반 샤라말 따나두반 딴닐라이일 닐빠데반 샷뜨루디 문날 ‘나’가 생겨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That입니다. ‘나’가 생겨나는 곳을 찾지 않으면 어떻게 ‘나’ 아닌 것이 생겨나는 자기 소멸에 이르겠습니까? 자기 소멸에 이르지 않으면 어떻게 참나가 ‘그것’인 진정한 상태에 머무르겠습니까? 28. 예룸붐 아간다이 예루미닷따이 니릴 비룬다 뽀룰까나 벤디 무르구달뽈 꾼다마디 야뻬찌 무짜닥끼 꼰둘레 안다리야 벤둠 아리비남볼 띤두달람 말과 호흡을 통제하고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물속에 빠진 것을 찾기 위해 아래로 깊이 들어가는 사람처럼, 그는 하고 싶다고 갈망하는aspiring 자아가 생겨나는 근원을 찾아내야 합니다. 29. 나넨드루 바얄 나빌라둘랄 마낫딸 나넨드렝 군두메나 나두달레 냐나네리 야만드리 안드리두나 나마두벤 드룬날뚜나이 야마두 비짜라맘 아바다날 미무라이예 ‘나’에 대한 모든 말을 멈추고 안으로 파고드는 마음으로 ‘나’ 생각이 솟아나는 곳을 찾으십시오. 이것이 지식의 길입니다. 대신 “나는 이것이 아니라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찾는데 도움은 되지만 그것이 찾는 것 그 자체는 아닙니다. 30. 나나 레남아나물 나디율람 난나베 나남 아반딸라이 나나무라 난아나 똔드루몬드루 따나가 똔드리누난 안드루뽀룰 뿐드라마두 따남 뽀룰뽕기 똔드라베 마음이 ‘나는 누구인가?’를 찾으며 안으로 향하여 가슴 안으로 들어가 합쳐지면, ‘나’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숙이면 다른 ‘나’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나-나’로 나타날지라도, 그것은 자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참나의 실체인 실재, 완성입니다. 31. 딴나이 아릿떼룬다 딴마야 난다룩꾸 옌나이 울라돈 드리얏뜨루달꾸 딴나이알라 안니얌 온드룸 아리얄 아발닐라이마이 인나덴 드룬날 예반빠라맙 빤눔 자아의 소멸로부터 생겨난 참나의 희열인 그에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는 이 참나 외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의 상태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32. 아두니옌 드람마라이갈 알띠다분 딴나이 예두벤드루 딴뗀 디라두 아두난 이두반드렌 드렌날우란 인마이이날 옌드룸 아두베따나이 아말바달레 아두부마라 베다들은 분명히 ‘그대는 그것이다’(땃뜨밤아시) 라고 말합니다. 이 때, 참나의 본질을 구하고 찾아서 그 안에 있지 않고 ‘나는 이것이 아니라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강함이 부족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이미 참나로서 영원히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3. 옌나이 아리예난 옌나이 아린데난 옌날 나가입뿌 끼다나굼 옌나이 따나이비다야 막까이루 딴운도 본드라이 아나이바라누 부디운마이 아롤 니나이바라베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라거나 ‘나는 나 자신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웃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른 것에 의해 알게 되는 하나의 것, 이렇게 두 개의 자기가 있다는 것입니까? 모두의 경험에 대한 진리인 오직 하나의 존재만 있습니다. 34. 옌드룸 예발꿈 이얄바이 울라뽀룰라이 온드룸 울랏뚤 우난두닐라이 닌드리다 운딘 드루루바루벤 드론드리란 단드렌드레 샨다이이달 마야이 샤락꼬리가 본디유람 본질적이고 진정한 실재는 모두의 가슴 안에 영원히 거합니다. 그곳에서 그것을 깨달아 그것 안에 거하지 않고 ‘그것은 있다’, ‘그것은 없다’, ‘그것은 형상이 있다’, ‘그것은 형상이 없다’, ‘그것은 하나이다’, ‘그것은 둘이다’, ‘그것은 어느 것도 아니다’라고 다투는 것, 이것은 마야의 장난입니다. 35. 찟따마이 울뽀룰라이 뗀디룻딸 싯디비라 싯디옐란 솝빠나말 싯디갈레 닛디라이빗 온달 아바이메이요 운마이닐라이 닌드루뽀임마이 띤달 띠양구바로 뗀디루니 꾼두마얄 언제나 존재하는 실재를 알아차리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성취입니다. 다른 모든 성취는 꿈에서 누리게 되는 능력들과도 같습니다. 자는 사람이 깨어나면 그것들은 실제입니까? 실제가 아닌 것을 벗어버리고 진리의 상태에 머무는 자들, 그들이 미혹되겠습니까? 36. 남우달렌 드렌니날라 남아두벤 드렌누마두 남아두바 닐빠달꾸 낫뜨룬아이에 야멘드룸 남아두벤 드렌누마데 난마니단 옌드레누모 남아두바 닐꾸마다 날아리야 데무야룸 우리가 몸이라 생각하고, 우리 자신에게 ‘아니, 나는 그것이다’ (아함 브람아스미)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 거하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것으로 거하는데, 왜 우리는 언제나 ‘나는 그것인가’하고 생각해야 합니까? 사람은 항상 스스로 ‘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합니까? 37. 사다깟딜 예두비단 삿디얏띨 앗두비담 오두긴드라 바다마둠 운마이얄라 아다라바이 딴떼둠 깔룸 따나이아다인다 깔랏뚬 딴다샤만 안드리얄 딴빗뚜 뽄드라 ‘찾는 중에는 이원성, 성취하면 합일’ 이 신념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열심히 구해서 나중에 스스로 찾아냈을 때, 이야기 속의 열 번째 사람은 열 번째 사람일 뿐 아무도 아니었습니다. 38. 비나이무달 나마인 빌라이빠얀 드루입뽐 비나이무달 아렌드루 비나비 따나이아리야 깔땃뚜 밤보이 까루마문드룽 깔아룸 닛따마 묵띠 닐라이이데 맛따나이 만약 우리가 행위를 하는 이들이라면, 우리는 그 행위들이 내놓는 열매들을 수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행위를 하는 이인 나는 누구인가?’라고 우리가 묻고 참나를 깨달으면, 대리인일 뿐인 감각은 사라지고 세 가지 까르마는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 해방은 영원합니다. 39. 밧다난 옌누맛떼 반다묵띠 신다나이갈 밧단아렌 드루딴나입 빨꿍갈 싯다마이 닛따묵딴 따닐까 닐까델 반다신다이 묵띠신다이 문닐꾸모 마낫뚝꾸 오땅 속박과 자유에 대한 생각은 사람이 ‘나는 속박되어 있다.’라고 느끼는 동안에만 지속됩니다. ‘속박되어 있는 사람인 나는 누구인가?’하고 스스로 물으면, 영원하고 언제나 자유로운 참나는 그대로 남습니다. 속박에 대한 생각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자유에 대한 생각도 사라집니다. 40. 우르밤 아루밤 우루바루밤 운드람 우루묵띠 옌닐 우라입빤 우루밤 아루밤 우루바루밤 아윰 아간다이 우루바리달 묵띠 우날이두 아룰 라마난 만약 ‘형상을 가진 것, 형상이 없는 것, 또는 형상이 있고 없는 것, 이 셋 중 어느 것이 최종적인 해방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해방은 ‘형상을 가진 것, 형상이 없는 것, 또는 형상이 있고 없는 것인가?’ 라고 묻는 자아의 소멸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울라두 날빠둠 온드루깔리 벤바밤 울라두 깟뚬 올리 슈리 라마나가 그의 은총으로 (지어서) 하나의 깔리벤바로 연결한 이 작품 울라두 나르빠두는실재를 드러내는 빛입니다.

 
LOG IN 로그인
 
SEARCH 검색
LOG IN 로그인
CART 장바구니
 
 
SEARCH 검색
LOG IN 로그인
CART 장바구니
 
글쓴이
내용
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사업자정보확인

호스팅제공자: (주)식스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