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명상의 자리는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깨끗한 곳이어야 한다. 그 자리 위에 약간의 꾸사 풀을, 그 위에 가죽을 그리고 그 위에 천을 놓아야 한다. 12. 이 자리에 앉고는, 마음의 활동과 감각을 통제하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함으로 그는 자신을 정화(세상의 생각, 무의식적인 마음과 그것의 기억, 모든 생각, 정서, 본능, 충동 등의 정화)하기 위해 명상을 해야 한다. 13. 몸, 목, 머리를 일직선으로 세운 뒤 움직이지 말며, 주위를 둘러보지 말고 미간(영적 비전의 자리)을 바라보아야 한다. 14. 고요하고, 두려움이 없고, 절제의 맹세에 확고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마지막 목표인 나를 명상해야 한다. 15. 명상으로 감각과 마음을 계속 통제함으로, 안에 있는 참나와 하나 된 요기는 나 속에 있는 니르바나라 부르는 궁극의 평화의 상태(지고한 참나, 평화의 바다)에 이른다(처음에는 사마디의 낮은 상태인 사비깔빠 사마디에 이른다. 마음이 특별한 대상에 너무나 집중함으로 마음은 모든 것을 잊는다. 이것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꿈과 같다. 그때 그는 자신의 마음, 생각과 환경을 자각한 채로 있다. 가장 높은 상태인 니르비깔빠 사마다에서는 몸은 정지하고 동작이 없으며, 마음은 진리의 여러 측면을 경험한다. 마음은 마음의 개인적 정체감을 잃고 우주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이 사마디는 가장 높은 마음의 초의식 상태이다. 마음의 이 상태에서 보통 인간의 의식은 생각이 없는, 맥박이 없는, 호흡이 없는 상태인 우주적 의식과 연결된다. 평화, 즐거움과 지고한 희열 이외에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는다. 니르비깔빠의 상태는 사하스라라 짜끄라가 열린 상태이다. 마음은 무한자와 하나 되며 그때 아무런 마음이나 생각은 없다. 그러나 순수한 평화, 즉 아난다와 존재 즉 삿만을 자각한다. 이 상태에 이른 사람을 빠라마함사라 부른다. 우주를 지각함이 없는 신 지각의 엑스터시 상태를 사비깔빠 사마디 혹은 삼쁘라가따 사마디라 부른다. 이 최고로 높은 상태에 들어감으로 요기는 해방된다. 그는 의식에서, 무의식에서, 초의식의 상태 동안에 자신의 신성한 깨달음을 유지할 수 있다. 신과 연합된 상급의 요기는 일을 할 때나 엑스터시의 무활동에 있을 때조차도 자기 자신의 몸을 지켜볼 수 있다. 신조차도 자신의 내재와 자신의 초월을 지켜볼 수 있듯이. 신의 바다와 하나가 된 요기는 It을 보고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작은 신체적 파도를 지켜본다. 그러한 요기는 니르비깔빠의 숭고한 상태 즉 완전한 자아의 소멸을 얻었다고 말해진다. 영혼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의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영 안으로 확장한다. 니르바나는 모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충족되지 못한 갈망의 파괴를 의미한다). 16. 오, 아르주나여! 요가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거나, 극도로 단식하거나, 너무 잠을 많이 자거나, 너무 오랫동안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17. 먹기, 휴식, 일, 수면, 깨어 있음이 적당한 사람에게는 슬픔(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의 파괴자인 요가를 얻는다. 18. 잘 통제된 마음이 참나에만 고정되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탐욕이 사라졌을 때, 그는 요가를 얻었다고 말해진다. 19. 바람이 없는 곳에 놓인 램프의 불이 흔들리지 않듯이, 참나에 집중하고 있는 요기의 가라앉힌 마음도 그러하다. 20. 명상의 수행으로 고요해진(정화된) 마음이 참나를 볼 때, 그는 참나에 완전히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