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질문자) 이 힘이 자유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 힘은 자유로 가는 길에 거치는 어떤 단계입니까? 그 힘들은 당신을 자유로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당신을 다른 일들, 즉 참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들에 몰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충분히 순수하고 충분히 오랫동안 수련한다면 부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빠탄잘리의 『요가 수뜨라』에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 해의 시간을 들일 수 있지만, 마침내 성공한다 해도 그것은 모든 나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꾼달리니 요가의 주된 사상은 공중부양이 아니고, 꾼달리니를 머리로 올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요기들과 요가 원문에는 그것이 사하스라라에 도달할 때 그 결과 자유가 온다고 합니다. 자유는 오르거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오르거나 떨어지는 것의 어떤 결과도 아닙니다. 꾼달리니 요가를 마스터한 사람은 한 번에 몇 달씩 요가 사마디 속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먼 옛날 한 번에 여섯 달 동안 사마디에 들어갈 수 있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왕에게로 나아가 “저는 먹지 않고 생리적 욕구에 응하지 않고 여섯 달 동안 사마디 속에서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 요기는 “저는 폐하가 타는 말을 원합니다. 여섯 달 후에 명상에서 깨어나면 그 말을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왕은 그 조건에 동의했습니다.여섯 달이 지났지만 그 요기는 명상에서 깨어날 수 없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도 여전히 그는 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왕은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20년 후 요기는 눈을 떴습니다. 왕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요기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자마자 그를 바로 왕에게 데려갔습니다.그는 새 왕에게 “선왕께서 약속하신 말을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그에게 “내 아버지가 약속한 것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 말은 몇 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말을 충분히 입증했기 때문에 새 말을 기꺼이 주겠노라.”고 했습니다.그 요기는 이 사마디 속으로 들어갈 때 특정한 말에 대한 욕구와 몇 달 뒤 사마디에서 나오면 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 욕구를 이십 년 동안 보류했지만 그 마음과 욕구가 다시 기능하기 시작했을 때, 그 욕구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어떠한 욕구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왕이 “나는 저 건물을 원한다.”거나 “나는 그 특정한 말을 원한다.”고 생각할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이미 그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토 내에 있는 것은 이미 모두 그의 것입니다. 무욕無慾을 통해 당신이 참나에 닿을 때, 모든 것이 자신의 참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상태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거나 “나는 저것을 원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을 원하는 ‘나’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당신 자신의 참나이고 아무것도 당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당신과 분리되어 있어 당신이 소유하고 싶은 어떤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었던 또 다른 인도의 왕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온 후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곤 했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한 탁발승이 찾아왔습니다. 왕은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탁발승은 그가 여러 문제들에 대해 신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기도가 끝나자 왕은 밖으로 나와 “짐은 기도를 마쳤노라. 이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무엇을 원하든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탁발승은 “저는 왕을 보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당신도 걸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신께 구걸하고 있군요. 저는 당신이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한 작은 욕망을 가지고 여기에 왔지만,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구걸하고 있는 그분에게 구걸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의 부탁을 바로 그 신께 직접 가져가겠습니다.”이 세상에서 걸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나 아니면 신에게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에게 가서 “저는 이것을 원합니다.” 아니면 “저는 저것을 원합니다.”라고 하면, 신이 매우 행복해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만 그 순간부터 당신은 신과 멀어집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을 때, 그때는 신이 당신 뒤에서 당신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닐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그는 항상 거기 있을 것입니다. 부탁하지 말고 욕구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구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새 질문자) 저는 제가 완전히 녹아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녹아 사라지고 있는 걸 느꼈습니다. 그것은 제가 경험해 본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경험이었지만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이 경험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요즈음 저는 이 경험과 다른 경험들을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 상태가 자유였거나 그것에 근접하는 어떤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 있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지각되는 저의 자아는 그 상태에서 녹아 사라져 제가 그 어떤 것도 전혀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나’가 사라진 상태에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 입니까? 제 경우는 드러누워 그것을 즐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는 그 당시 진정한 스승이 옆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문제, 당신의 불운이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진정한 스승과 만날 수 있었다면, 그는 또 하나의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저 보통의 활동이 아닌 200%나 더 활동적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도 세상에서 여전히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방금 말했듯이 당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두 배나 더 활동적일 수 있습니다. 200%나 더 활동적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