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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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소리 5>

불멸의 의식

지은이 : 라마나 마하리쉬
옮긴이 : 김병채
출판사 :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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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 책은, 유일한 하나의 실재는 영원하고 실재하며 어디에나 있는 절대자라는 바가반 라마나 마하리쉬의 귀중하고 직접적이고 심오한 가르침들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보여 주고 있다. 바가반의 가르침은 영적 지혜의 향기이자 바탕이다. 모든 단어와 문장은 바가반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헌신자들의 질문에 대한 바가반의 답변들이다. 원문을 간결하게 요약한 곳은 별표(*)로 표기하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바가반의 가르침은 대부분 구도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질문들을 생략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질문들이 바가반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으므로 질문들을 생략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았다. 때로는 가르침의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앉아 있거나, 걷거나, 음식을 먹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심지어 잠을 자는 동안에 매우 놀랍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문득 그 의미가 다가올 것이다. 그 의미가 확 들어오며, 그래서 선명히 이해하게 된다. 바가반 라마나 마하리쉬는 대중을 상대로 강연한 적이 없다. 바가반은 침묵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바가반은 침묵과 자비로운 바라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가반은 침묵이 확실한 가르침이라 하였다. 침묵은 언제나 말하고 있다. 침묵은 끊임없이 흐르는 언어이다. 바가반이 말한 대로 침묵은 영원하며 온 인류에게 이로움을 준다…… 바가반의 가르침이 침묵을 통하여 알려졌듯이…… 침묵은 그치지 않는 웅변이다. 침묵만이 영원한 말이며,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하나의 말이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바가반의 주된 가르침이며 직접적인 길이자 의식인 “난 야르(Nan Yar,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한다. 제2부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변함없는 의식을 다루고 있다. 제3부는 자기 탐구, 자아, 마음, 환생과 다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가끔 반복되는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바가반의 가르침의 연속이다. 저항하는 마음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복이 필요하다. 바가반은 말했다: 자아와 다름없는, 내가 몸이라는 지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지식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우리가 한계 없는 참나라는 자각입니다. 진정한 구도자라면 누구나 바가반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바가반의 가르침은 자기 존재의 핵심을 알고자 탐구하려 하는 진지한 구도자에게는 특별히 가치가 있다. 그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핵심이며 가슴인 변하지 않는 참나는 절대자이다. 이 나는 무한한 나이다.

 

 

차례

 

제1부 1. 베다 2. 내면의 구루 3. 구루의 은총 4. 난 야르 5. 브라만 6. 부마 7. 가슴 8. 실재 9. 자각 10. 고요하라 11. 희열 12. 은총 13. 침묵 14. 홀로 있음 15. 평화 16. 참나 17. 참나에 머무르기 18. 시간 너머의 참나 19. 행복 제2부 1. 사랑 2. 신 3. 삿 4. 의식 5. 존재 6. 있음 7. 그것 8. 이다 9. 보는 자 10. 투리야티타 11. 자그라트 수숩티 12. 세 상태 상태 13. 갸니 14. 성자의 고요 15. 신의 발아래 16. 깨달음 17. 참나는 항상 깨달아 있다 제3부 1. 길 2. 참나 망각 3. 무지 4. 마야 5. 몸 6. 자기 탐구 7. 나 생각 8. 자아 9. 마음 10. 바사나 11. 만트라 12. 타파스 13. 환생 14. 고통 15. 아루나찰라 16. 프라닥쉬나 17. 나마스카라 18. 지혜의 이슬

 

 

책 속으로

 

6. 자기 탐구 자기 자신을 알기 자기 탐구는 진정한 그대 자신인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를 깨닫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자기 탐구는 찾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존재하고 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인 것을 우리가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탐구만이 자아도 마음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으며, 참나 혹은 절대자의 나뉘지 않은 순수 존재를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탐구는 직접적인 길이며, 다른 모든 방법들은 간접적인 길입니다. 자기 탐구는 참나에게로 안내하며, 다른 방법은 다른 곳으로 안내한다. 왜 시간을 낭비합니까? 자기 탐구가 아닌 다른 영적 수행으로 자아 혹은 마음을 없애려는 노력은 도둑이 경찰로 변장해 자기 자신인 도둑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은 참나입니다. 자기 탐구를 통하여 마음이 참나에 녹아들어 하나 되게 하십시오. 자기 탐구는 결코 공허한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트라를 반복하는 것 이상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가 단순히 마음으로 묻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대단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자기 탐구의 진정한 목적은 마음 전체를 마음의 근원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나’가 다른 ‘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탐구는 공허한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 전체를 순수한 참나 자각에 안정되게 유지하려는 마음의 강한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호흡과 말을 통제하고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나’가 일어나는 근원에 도달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자기 탐구입니다. 마음을 참나에 항상 고정시키는 것이 자기 탐구입니다. ‘나’라는 일인칭이 존재한 다음에, ‘너’라는 이인칭과 ‘그’라는 삼인칭이 존재할 것입니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절대 존재인 그것 안에서, 탐구에 의해 ‘나’가 그 본성 안으로 사라지고, 더불어 ‘너’와 ‘그’도 그 본성 안으로 사라집니다. 몸은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깊은 수면에서조차 ‘나’가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가 나타나면 다른 모든 것들이 잇따라 나타납니다. 예리한 마음으로 ‘나’가 어디서 일어나는지 탐구하십시오. ‘나’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나’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하여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여 탐구하는 것이 참나 지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탐구입니다. 이렇게 하는 대신에 “이것은 나가 아니다. 그것이 나다.”라는 묵상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탐구일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자기 탐구는 그대가 그대의 자기에 매달릴 때 그리고 생각의 물결인 심적 움직임에서 벗어날 때 시작됩니다. 자기 탐구는 마음을 참나 속에 두는 것입니다. 자기 탐구를 통하여 가슴에 이르면, ‘나-나’라는 영속하는 참나 자각이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서 드러냅니다. 거기서 ‘나’가 가라앉고 사라집니다. ‘나’ 없음인 참나 자각의 존재는 참나 탐구를 통하여 자아를 소멸시킴으로서 깨달아지는 자신의 진정한 상태입니다. 자기를 탐구하는 것은 존재의 탐구 혹은 부단한 자각입니다. 참나 절대자의 본연의 묘사할 수 없는 희열로 있는 완전한 존재의 상태를 깨달은 이에게는 이루어야 할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자기 탐구는 내적 탐색입니다. 마음을 붙잡고 그것을 조사하는 것은 초보자에게 권할 만합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참나의 투영입니다. 마음이 누구에게 나타나고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보십시오. ‘나’라는 생각이 근본 원인임이 밝혀질 것입니다. 더욱 깊이 들어가십시오. ‘나’라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거기에는 무한히 확장된 ‘나’-의식이 있습니다. 18. 지혜의 이슬 깨어 있는 동안에도 잠의 상태에 이르면 그대는 갸니(성자)가 됩니다. 의식만이 그대입니다. 그대만이 의식입니다. 태어남과 죽음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의식뿐입니다. 몸이 태어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하지만 의식의 태어남을 아는 이가 있습니까? 그대의 진정한 본성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십시오. 그 밖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의 근원은 참나입니다. 자기 탐구를 통하여 마음이 참나에 녹아들어 하나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가 참나 안에서 녹아 없어질 때, 참나는 자신의 모든 영광으로 빛날 것입니다. 진정한 그대 자신인 참나로 있는 것이 늘 그대의 것인 희열을 깨닫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신은 다름 아닌 참나입니다. 자아를 소멸시켜 참나를 보는 것이 곧 신을 보는 것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마음의 환영일 뿐입니다. ‘나’라는 것이 소멸될 때, 즉시 유일자가 ‘나-나’로서 빛납니다. 그것만이 전체(푸르남)입니다. 참나 깨달음은 최고의 가치이며, 인간 존재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있는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것이 목표입니다. 궁극의 목표는 불멸의 의식을 깨닫는 것입니다. 스승은 내면에 있습니다. 명상은 스승이 바깥에만 있다는 무지한 생각을 없애려는 것입니다. 명상은 명상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자기 탐구에서는 주체만 있고 대상은 없습니다. 사다나(수행)는 얻을 목표와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지 않아서 얻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참나는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 것을 그만둠으로써, 고요히 있으면서 그저 진정한 자신으로 있음으로써 실현됩니다. 명상하지 마십시오. 존재하십시오. 그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존재하십시오. 참나를 아는 것은 참나로 있는 것입니다. 두 개의 분리된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무지를 초월하여 있는 지식이 진정한 지식입니다. 거기에는 알아야 할 대상이 없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이 알려질 때,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각-희열입니다. 속박과 해방에 대한 모든 생각들 너머에 있는 이 지고의 희열의 상태에 있는 것이 절대자에 대한 봉사로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소멸되어 절대자 안에 휴식하는 위대한 요기에게는 카르마가 없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인 절대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보이는 욕망이 깃든 카르마, 즉 행위는 결코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습니다. 카르마와 그것의 결과인 쾌락은 매우 빨리 끝납니다. 그것들은 신만이 주는 영원한 희열을 줄 수 없습니다. 성자는 마음이 없는 이입니다. 마음이 조금만 움직여도 그것이 곧 삼사라이며, 그것의 멈춤이 자유입니다. 삼사라는 오직 그대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삼사라는 속박입니다. 묵티가 해방입니다. 마음을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삼사라입니다. 마음을 자기 안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방입니다. 속박과 자유는 둘 다 그저 생각들입니다. 그것들은 지혜의 상태가 아니라 무지의 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생각들은 이전의 수많은 삶들에서 축적된 바사나(경향성)입니다. 바사나의 소멸이 목표입니다. 모두가 영원한 참나를 자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보지만 여전히 자신은 영원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진리는 스스로 드러납니다. 의식하는 참나를 자각 능력이 없는 몸과 혼동함으로써 사람들은 착각에 빠집니다. 이러한 착각은 끝나야 합니다. 참나로 있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습니다. 노력도 필요 없고,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잘못된 정체성만 버리고, 자신의 영원하고 자연스럽고 타고난 상태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참나는 항상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입니다. 그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와 별개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둔은 참나 안에 거주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침묵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자들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로 가슴에게 말하는 가슴입니다. 침묵은 웅변이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은총의 상태입니다. ‘나’와 ‘나의 것’을 소멸시키는 지고의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불멸을 깨닫는 수단입니다. 우주의 유일한 궁극의 원인인 지고의 존재는 많은 것들로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것들은 그 존재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고자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참나입니다. 참나는 순수 의식입니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깨우침의 근원입니다. 지고자는 가슴에서 참나로 빛납니다. 지고자를 신, 참나, 가슴, 의식의 자리 등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다음의 것입니다. 가슴은 존재의 핵심, 중심을 의미하며,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가반은 요구하지 않아도 주는 것이 충만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지은이 :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 (Sri Ramana Maharshi 1879.12.30 - 1950.4.14)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남인도의 성산 아루나찰라에 살았던 이 시대의 스승이다. 그는 1897년 남인도의 티루출리에서 태어났으며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17세 때 아무런 탐구도, 아무런 노력도, 아무런 의식적인 준비가 없는데도 깨달음이 왔다. 그러자 그는 단 한 순간에 재빨리, 평범한 소년에서 성자로 변모되었다. 깨달음이 있은 지 2개월 후 티루반나말라이에 있는 아루나찰라 산으로 인도외어 오고는 마침내 합일의 희열 속에서 그의 여정은 끝을 맺었다. 그는 참나를 발견한 희열에 완전히 잠겼으며, 낮이 가고 밤이 오기를 반복해도 사마디에서 깨어날 줄을 모르면서 산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자신을 찾아오면 그냥 고요히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서 그윽한 연민의 눈기을 보내기만 하였다. 그러면 그를 찾아왔던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축복에 휩싸이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동안 쌓여왔던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그의 발밑에 엎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침묵의 가르침이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에게 우주적이고 무한한 사랑으로 가르침을 펼치는 성자가 그곳에 거주하고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 마하 사마디에 들 때까지 그는 삶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으며,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는 파괴할 수 없는 실재와 비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 완벽하고도 평화로운 삶, 그리고 천상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온 인류에 보여 주기 위해, 그의 생을 살며, 침묵의 힘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화신이었다.

옮긴이 : 김병채 (Sri Krishnadass 1948. 2. 23 - )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움과 진리를 추구하였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88년 12월 인도로 건너가 성자 요겐 드라지, 오쇼 라즈니쉬, 테레사 성녀, 달라이 라마, 나나가루 등 다수의 성자를 만났다. 그 후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힘에 이끌리게 되어 라마나스라맘에 머물렀으며, 1989년 4월 22일 갠지스 강가의 하리드와르에서 라마나 마하리쉬의 제자 슈리 푼자와의 삿상을 통하여 마침내 희열에 들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슈리 크리슈나다스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계속적인 만남을 통하여 무한한 사랑도 받았다. 지금은 국립 창원대학교와 대안대학원인 샨티구루쿨에서 요가 및 베단타를 가르치고 있으며, 영원한 삿구루이신 슈리 라마나와 슈리 푼자의 가르침을 펼치기 위하여 창원 북면에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을 열고서 삿상을 주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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